넋두리

[스크랩] 저언덕에 이르다.(파라밀다)

바이크투어러 2006. 6. 30. 20:18
저언덕에 이르다.(波羅蜜多,파라밀다)

나그네는 이언덕을 버리고 정언덕을 찾지만
뱃사공은 왼종일 노를 저어도
강건너 나루터를 밟지않는다.
왜오르지 않느냐고?
뱃사공에게 물어보소
바라밀다(波羅蜜多)란 범어(梵語)다
한자로는 도피안(到被岸)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저언덕에 이른다>라고 하는 뜻이다.
강건너 마을이다
이쪽은 근심걱정이 많은 괴로운 마을이요,
강건너 마을은 괴로움이 전혀 없는 파라다이스,
이상적인 낙원이다,
강 이쪽 마을이란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요
강건너 이상향은 깨달음의 세계,부처님의 세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싣달타라는 이름의 왕세자로 궁궐에 계시면서 온갖행략을 누렸으나 한때도
마음편할날이 없으셨으므로 마침내 괴로움에서 벗어날수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궁굴을 떠나셨던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저 하는 이상낙원은 궁궐이나 향락같은것이 아니다.
인간싣달타가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시고보니
온갖괴로움이 하나도 없으셨다고 한다.
바로 이<괴로움없는 마음>이 강건너 마을이요 이상낙원이다 그러므로 바라밀다란 <괴로움없는 마음>에 이르는것이다.
그러면 이<괴로움없는 마음>은 무엇인가?
깨달은 마음이다.
무엇에 대하여 깨달은 것인가.
괴로움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과 깨달음>은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 같은것임을 알수 있다.
괴로움이 곧 깨달음이요. 깨달음이 괴로움이다.
쌀로 밥을 지으므로 쌀과 밥이 다르지 않듯 괴로움이 있어 깨달음을 얻으므로 괴로움과 깨달음은 서로 다른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번뇌 망상이요 깨달음은 반야다.
그러므로 번뇌망상이 곧 반야지혜인 것이다.
괴로운현실을 떠나서 괴로움없는 깨달으면 현실이 곧 괴로움없는 세계다 그러나 쌀은 밥이 아니다. 밥은 쌀로 지은 것이므로 쌀이 아니라고
할수 없지만 쌀은 아직 밥이 아닌것이다
생쌀씹는 맛이 어찌 기름기 잘잘 흐르는 햅쌀로 지은 밥맛과 같겠는자!
괴로운 현실은 그대로 괴로움없는 이상낙원은 아닌것이다!
깨닫고 보면 이상과 현실이 둘이 아니지만
깨닫지 못하면 현실과 이상은 하늘과 땅이다.
그러므로 현실 생활 가운데서 근심,걱정이 태산같은사람은 힘써 근심 걱정없는
곳 강 건너 이상향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닦는다 해도 어리석으면 피안에 도달할 수 없다.
마치 모래로는 밥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라
한 것이다. 지혜가 없이는 바라밀다 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깨달음이다. 괴로움의 근본이 무엇인지 깨닫는 주체가 반야요 그 깨달음의 결과가 바라빌다이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지혜도 바라밀다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이 언덕도 저 언덕도 없다.
버릴 괴로움도 얻을 즐거움도 따로 없는 것이다.
뱃사공은 온 종일 손님을 실어나르지만 자신은 강 건너 마을로 건너가지 않는다. 강 건너 마을에 특별히 볼 일이 없는 까닭이다.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이 바로 이상세계이지 이 세상을 떠나 달리 약속된 땅이 없다. 그러므로 이상과 현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아 괴로움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는이라야 참으로 바라밀다를
이룬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신 후 45년간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하늘나라에서 사신 것이 아니다. 근심 걱정이 잠시도 떠나지 않는 중생심을 떠나서 따로 부처님마음이 없고 아귀 다툼하는 이 사회를 떠나 따로 이상적인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한 마음 깨달으면 <이언덕>이 <저언덕>이다.
한마음 어리석으면 <이언덕>과 <저언덕>은 10만8천이다.
[산토끼 잡으러 갔다가 집 토끼마저 도둑맞는다네]

자광합장
출처 : 산사가는길
글쓴이 : jakw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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